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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실록으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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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동군 지음
  • 신국판(152×225mm)
  • 384쪽, 국문
  • 16,000원
  • ISBN 978-89-6801-059-0 (03910)

조선왕조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궁궐이 들려주는 이야기!!

사람은 삶으로써 흔적을 남기고

집은 그 흔적을 간직함으로써 삶(역사)을 기억한다.


사람 없이 ‘집’이 존재할 수 없고, 집이 존재해야만이 삶이 이어질 수 있다. 그렇게 이어진 삶들은 역사가 되어 세상에 남는다.

김춘수 시인이 그의 작품에서 이름을 불러주어야 비로소 꽃이 된다고 했듯, 집이란 누군가의 삶이 들어서는 순간 비로소 ‘집’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관광지로 쓰이는 궁궐도 이전에는 누군가의 집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담긴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그곳에서 살았던 조상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봐야 한다. 이미 100여 년 전 왕조시대가 끝난 오늘날, 궁궐 속 우리 조상들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것으로 아무리 왕이라 해도 자신의 실록은 물론 선왕의 것 또한 고칠 수도 볼 수도 없었다는 점에서 권력에서의 완벽한 독립성이 인정되고 있다. 또한 실록에는 사신의 주관적 논평, 즉 사론도 함께 기록됐는데 이는 사건의 시말이나 시비는 물론 관직 임명에 대한 의견, 생전 또는 사후의 인물에 대한 주관적 의견도 포함되어 역사를 바라보는 눈의 역할을 했다.

 

저자는 실록을 근거로 경복궁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다뤘다. 책은 단순히 궁을 답사하기 위한 가이드북이 아닌 우리의 역사를 함께 되짚어보며 시간 속에 지워져 가던 경복궁의 진정한 의미를 만나게 해 줄 것이다.

 

세종은 풍수전문가였다?!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발전을 이룬 세종대왕이 사실은 풍수전문가라고 하면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실록을 통해 보면 세종대왕 또한 풍수지리가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정통이 아닌 이단의 학문임을 확실하고 간혹 허황된 내용도 있다고 얘기하지만, 조상 대대로 수용해온 것이기에 버릴 수는 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또한 기왕 쓰려 한다면 제대로 써야 한다며 집현전에서 제대로 강습하라고까지 이야기했다.

풍수에 대한 이 같은 태도는 비단 세종대왕뿐만 아니라 조선의 역대 왕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풍수지리 외에도 도교계통의 소격서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세종이 풍수지리를 따져 궁 안 금천(禁川)으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에 대한 내용이 세종실록에 자세히 실려있다.

 

세종 15년(1433) 7월 21일 / 황희, 맹사성, 권진 등을 불러 강녕전, 경회루, 역상 등에 관해 논의하다

…(전략)… “근자에 글을 올리어 (풍수)지리를 배척하는 사람이 더러 있으나, 우리 조종께서 지리로서 수도를 여기다 정하셨으니 그 자손으로서 쓰지 않을 수 없다.

정인지는 유학자인데, 역시 지리를 쓰지 않는 것은 매우 근거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고, 나도 생각하기를 지리의 말을 쓰지 않으려면 몰라도, 만일 부득이하여 쓰게 된다면 마땅히 지리의 학설을 따라야 할 것인데, 지리하는 자의 말에, `지금 경복궁 명당에 물이 없다`고 하니, 내가 궁성의 동서편과 내사복시(內司僕寺)의 북지(北地) 등처에 못을 파고 도랑을 내어서 영제교(永濟橋)의 흐르는 물을 끌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연산군의 무오사화는 당연한 것?!

지금의 많은 사람들은 연산군이라고 하면 ‘폭군’의 이미지를 많이 떠올릴 것이다. 연산군이 폭군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다. 하지만 그가 재위기간 내내 폭군이었던 것은 아니다. 연산군은 아버지였던 성종과 달리 준비된 적장자로서 왕위에 올라 신권이 왕권을 넘어서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연산군이 강력한 왕권을 세우려 노력하던 중 성종의 실록을 편찬함에 있어 김일손이 쓴 사초가 문제가 되어 일어난 사건이 무오사화이다.

김일손은 자신의 스승인 김종직이 단종의 일로 조의제문을 지어 분개했고, 그 때문에 본인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넣었다고 증언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세조의 계유정난을 비난하는 글로 연산군에게는 자신의 증조부를 모독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까지 내려오는 왕위 정통성을 흔드는 것이기에 대역죄로 다스림이 당연했다.

이처럼 무오사화는 갑자사화와 달리, 연산군이 폭군이어서 일어난 일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연산군이 아닌 그 어떤 다른 임금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이 같은 일을 용납하고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오사화가 일어남에 있어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한 자는 건춘문 파수꾼 출신으로 간신의 대명사가 된 유자광이다. 유자광은 누구도 해석할 엄두를 내지 못한 조의제문을 글귀마다 풀이해 그 글이 세조를 비판하는 글임을 연산군에게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랬던 그가 중종반정이 일어나가 적극 가담했고, 연산군일기에는 그런 그에 대한 사관의 부정적 평가가 적나라하게 남아있다.

 

연산 4년(1498) 7월 29일 / 유자광에 대한 평가 내용과 무오사화의 전말

…(전략)… 유자광은 부윤(府尹) 유규(柳規)의 서자[孽子]로, 날래고 힘이 세었으며, 높은 나무를 원숭이와 같이 잘 탔다. 어려서 무뢰자(無賴子)가 되어, 장기와 바둑을 두고 재물을 다투기도 했으며, 새벽이나 밤에 떠돌아다니며 길가에서 여자를 만나면 마구 끌어다가 음간(淫姦)을 하므로, 유규는 그 소출이 미천한데다가 또 방종하고 패악함이 이러하니, 여러 번 매질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갑사(甲士)에 소속되어 건춘문(建春門)에서 파수를 보다가 상소하여 자천(自薦)하니, 세조가 그 사람됨을 장하게 여겨 발탁하여 썼다. 또 무자(戊子)년에 고변(告變)한 공로로써 훈봉(勳封)을 받아 1품(品)의 품계로 건너뛰었다. …(후략)

 

단종은 근정문, 세조는 근정전?!

근정전은 경복궁의 중심이 되는 정전이며 근정문은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이곳에서는 역대 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이 거행되었다. 그렇다면 역대 조선 왕들은 모두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렸을까? 실록을 살펴보면 왕마다 즉위 장소가 다름을 볼 수 있다.

 

단종 즉위년(1452) 5월 18일 /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하다

노산군(魯山君)[후일 단종으로 복위됨]이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卽位)하고, 반교(頒敎)하기를, …(후략)…

 

세조 1년(1455) 윤6월 11일 / 노산군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하다

…(전략)… 세조가 사정전으로 들어가 노산군을 알현하고 면복을 갖추고,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卽位)하였다. …(후략)…

 

그렇다면 왜 왕들마다 즉위 장소가 달랐던 것일까? 무릇 왕의 즉위는 이전의 왕이 죽어 그 자리가 비어야만이 행해지는 행사이다. 따라서 왕의 즉위식은 경사가 아닌 조사로 흉례(凶禮)의 예를 따랐다. 정상적인 왕의 승계가 일어날 경우 당시 국법대로라면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리는 것이 맞다. 하지만 세조는 단종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흉례를 따르지 않고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각 건물들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우리가 접하는 문화재를 컴퓨터로 예를 들자면 유물 또는 문화재들은 하드웨어이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역사)는 소프트웨어이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컴퓨터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듯 문화재 속에 담긴 역사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문화재 답사를 했다고 볼 수 없다. 스스로 한번 자문해보자. 우리는 항상 겉으로 들어난 경복궁의 하드웨어만을 둘러보고 있지 않은가? 본 서적에 실린 소프트웨어(역사)를 잘 숙지하여 경복궁의 하드웨어와 접목시킨다면 그 순간부터 새로운 경복궁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목차

머릿말 _4

 

궁성과 사대문 _12

경복궁의 입지선정 – 동전던지기로 결정하다 _13
궁성 – 연산군의 궁성밖 민가철거는 적법했다 _32
광화문[南門] – 제1차 왕자의 난의 분수령 _51
건춘문[東門] – 간신의 대명사가 된 파수꾼 _64
영추문[西門] – 청일전쟁의 서막을 열다 _74
신무문[北門] – 조광조의 몰락을 지켜보다 _81
동십자각[闕의 흔적] – 서십자각은 어디로 갔을까? _88

 

외조 일원 _94

흥례문[中門] – 원래 이름은 홍례문 _95
영제교[禁川橋] – 풍수지리의 상징물 _104
유화문과 기별청 – 수많은 관청들의 조화를 상징하다 _115

 

치조 일원 _123

근정문 – 왕의 즉위식이 열리던 장소 _124
근정전[法殿,正殿] – 정도전의 숨은 뜻을 담다 _140
사정문과 사정전[便殿] – 왕이 일상정치를 하는 곳 _166
만춘전과 천추전[보조便殿] – 천체관측활동의 중심지 _193

 

동궁 일원 _206

자선당 – 왕세자를 노린 저주사건과 방화사건 _207
비현각 – 삼고초려의 원조, 명재상 이윤을 본받아라 _216

 

대전과 중궁전 일원 _220

향오문과 강녕전[大殿] – 세조의 술자리 정치 _221
연생전,경성전,연길당,응지당[小寢] – 오행의 상징물 _232
양의문과 교태전[中宮殿] – 음양의 상징물 _241

 

함원전과 흠경각 _251

함원전 – 단종의 비극을 간직한 전각 _252
흠경각 – 조선의 표준시는 이곳에서부터 _268

 

경회루와 수정전 _279

경회루 – 아무나 볼 수 없었던 비경을 간직한 곳 _280
수정전 – 집현전이라 불리웠던 전각 _303

 

자경전 일원 _312

자경전 – 남편보다 더 대접받은 조대비 _313

 

건청궁 일원 _323

향원지와 향원정 – 중국사신마저 감탄한 곳 _324
건청궁 – 고종의 독립의지를 상징하다 _329
장안당과 곤녕합 –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연루된 대원군 _339

 

집옥재 일원 _348

집옥재 – 일본의 뒤집기 한판 _349

 

태원전 일원 _357

태원전 – 묘호가 바뀐 왕들 _358

 

집경당과 함화당 _369

집경당과 함화당 – 외국 사신들과의 접견장소 _370

저자 소개

志于學士 최동군(崔東君)

다음, 네이버, 페이스북 닉네임: 동쪽임금(東君을 풀어씀)

강원도 원주에서 육군 보병 장교 최준호 대위와 김주자 여사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남. 1973년 부산 연제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동해중학교, 동인고등학교를 거쳐 1991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문화재와 역사에는 특별한 지식이 없는 평범한 시민이었음. 그러던 중 1997년 태어나서 처음 참여한 2박3일간의 ‘경주고적답사’에서 거의 신내림에 가까운 큰 문화적 충격 및 감명을 받았고, 그 후로 우리 문화재와 역사에 대해 독학으로 집중 공부함. 또한 평소 ‘배워서 남 준다’는 소신으로 많은 문화답사 강좌 및 모임을 통해 우리 전통문화와 역사를 전파하고 있음.

유튜브(YouTube)에서 ‘최동군’으로 검색하면 <답사방법론 12가지>, <음양오행과 풍수>, <궁궐>, <불교 및 사찰>, <조선왕릉> 등 다수의 특강 동영상을 볼 수 있음.

2013년부터 글로벌사이버대학교에서 ‘문화해설사 입문’ 과목을 강의중이며 2016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중임.

 

  • 주요 저서 및 논문
  • 2016 향교·서원 활용모델 개발에 관한 연구
    (2016 동양철학문화연구소)
  • 8일간의 화성행차 정조반차도 (2016)
  • 현장학습 1번지 국립고궁박물관 (2016)
  • 답사여행 1번지 경주 (2016)
  • 문화재 속 숨어 있는 역사 (2015)
  • 나도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다 Series
    궁궐편(2011), 사찰편(2012), 북한산둘레길편(2013), 능묘편(상·하/2014)

 

  • 공식카페: cafe.daum.net/NaMoo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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