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창경궁 실록으로 읽다

231
0

  • 최동군 지음
  • 신국판(152×225mm)
  • 224쪽, 국문
  • 13,000원
  • ISBN 978-89-6801-068-2 (03910)
    ISBN 978-89-6801-066-8 (set)

대비들을 위해 지어진 창경궁!

보조 궁궐로 지어졌지만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소현세자와 사도세자의 최후를 지켜본 것도,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쫓겨나는 것을 지켜본 것도 바로 창경궁이었다!!


창경궁이 경복궁, 창덕궁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가장 눈에 띄게 다른 점은 바로 정문의 방향이다.
정문이 남쪽을 향해 열려있는 다른 궁들과 다르게 창경궁은 동향을 하고 있다. 또한 정전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문의 수가
경복궁과 창덕궁은 3개인 것에 비해 창경궁은 단 두 개뿐이다.

창경궁이 다른 두 궁과 다른 이유는 왕이 아닌 대비를 위해 지어진 궁궐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왕에게는 왕실 어른인 대비가 한 분이거나 많아야 두 분이다. 하지만 성종이 즉위할 당시에는 대비가 무려 세 분이었다.
세 분의 대비를 한 전각에 모실 수 없어 지어진 궁궐이 바로 창경궁인 것이다.

다른 궁들보다 지위가 낮은 만큼 창경궁에서는 조선 왕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정조, 아들을 질투한 인조, 아들의 극한으로 내몰던 영조, 동생에게 쫓겨 궁을 탈출한 연산군.

책은 실록을 근거로 창경궁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다뤘다. 단순히 궁을 답사하기 위한 가이드북이 아닌 우리의 역사를 함께 되짚어보며
시간 속에 지워져 가던 창경궁의 진정한 의미를 만나게 해 줄 것이다.

 

사도세자와 장희빈의 죽음을 함께한 선인문

창경궁 홍화문 남쪽에 위치한 선인문. 정면 2칸의 작은 문이지만 많은 역사적 사건을 목격한 문이다.
우선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가 폐서인되어 사가로 쫓겨 갈 때 이 문을 통해서 나갔고, 중종반정 때의 연산군도 이 문을 통해 궐 밖으로 나갔다.
선인문이 목격한 사건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은 바로 사도세자와 장희빈에 대한 것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사건은 많은 미디어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매체에서 많이 봐왔던 것처럼 사도세자는 정전 앞에서 뒤주에 갇히고 최후를 맞이했을까?

궁은 기본적으로 명당 위에 세워지고 그 명당의 기운이 궁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물길로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모든 궁궐은 돌다리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그 자리에는 나쁜 기운이 생겨나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는 명당기운이 약하거나 다른 곳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 장소를 골라 놓여졌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요소를 따져봤을 때 그가 최후를 맞이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 바로 선인문 안마당이다. 사도세자와 같은 이유로
사약을 받은 장희빈의 시신도 이 문을 통해 궁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숙종 27년(1701) 10월 10일

장씨의 상을 선인문으로 나가게 하다

하교하기를,

장씨(張氏)의 상()을 단봉문으로 내보낸다면 건양현(建陽峴)을 지나갈 것이니,
일이 미안한 데 관계된다. 어느 문으로 내보 내야 할 것인가? 병조로 하여금 품정(稟定)하게 하라.” 하니, 병조에서 아뢰기를,

“취선당이 건양현과 명정전 사이에 있으니, 서쪽으로 건양현을 지나고 동쪽으로 명정전의 어로(御路)를 지나는 것은 모두 미안할 듯합니다.
선인문(宣仁門)으로 나가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아들을 질투한 인조의 상식 밖 행동?!

인조는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면서 자존심에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볼모로 끌려간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잘 적응하며 백성을 살핀다는 미담은 그에게 더욱 큰 불안감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청나라에서는 노골적으로 세자를 언급하며 인조를 압박했는데,
심지어 병자호란 때 차라리 인조 대신에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웠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말까지 흘렸다.

어찌보면 자신의 정치 라이벌인 세자가 자신보다 유능해 보이는 것이 결코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조는 소현세자 내외에게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바로 세자빈 강씨의 부친상에 그들이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청에 볼모로 잡혀있던 세자내외는 세자빈 강씨의 부친상 조문의 이유로 임시귀국을 허락 받았는데, 인조가 빈소참배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신하들도 참배를 허하라 청하였지만 인조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세자가 기나긴 볼모생활을 마치고 완전히 귀국했을 때, 마중도 가지 않았으며 잔치도 열지 말라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소현세자의 사후 시신의 상태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어 충분히 설득력 또한 얻고 있다.

 

인조 22년(1644) 2월 9일

영의정 등이 세자빈이 부모를 찾아뵙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아뢰다

영의정 심열, 좌의정 김자점, 우의정 이경여가 아뢰기를, “세자빈이 이역(異域)에서 나그네로 붙여 있다가 뜻밖에 어버이의 상을 만났으니
슬픈 마음으로 궤연(几筵)에 임하고 또 모친을 살펴보는 것이 인정이나 예의로 보아 폐할 수 없는 일인데 돌아갈 기일은 임박하고 어버이를
살펴보았다는 말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중략)… 세자께서 당초에 빈궁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할 때, 부친은 죽고 모친은 병중에
있다는 것을 아울러 거론하여 그 이유로 내걸었는데, 이제 찾아가 곡하고 모친을 살펴보는 절차가 없으면 저쪽 청나라가 그 말을 들을 때
또한 반드시 의아해 할 것입니다
. 신들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미안한 바가 있으므로 감히 소견을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과인이 지금 재변이 참혹하고 민심이 안정되지 않은 것을 걱정하느라 법 밖의 예나 외람한 거조는 생각이 미칠 틈이 없다.” 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은 지덕체를 모두 갖추어야 했다?!

한 때, ‘한 우물만 파면 된다’라는 문구가 들불처럼 번지던 시기가 있었다.
그 이후 ‘하나만 잘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문구가 다시 번지면서 한 사람에게 다재다능을 추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래서 지금은 공부는 기본에 악기, 운동은 물론 취업 면접까지 학원을 다니며 배우고 있다.

이처럼 한 사람에게 다양한 재주를 바랬던 건 비단 현 시대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루 종일 글공부만 했을 것 같은 성균관 유생들도 글공부는 기본에 무예까지 익혀야 했음을 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성종 8년(1477) 8월 3일

성균관에 나가 석전을 행하고 명륜당에서 유생을 시험하도록 명하다

…(전략)… 술이 세 순배 돌자,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는데, 헌 가(軒架)에서 풍악이 연주되니, 임금이 네 대의 화살[乘矢]을 쏘아 1시(矢)를 맞혔다.
그리고 나서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 과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이하 68인이 차례로 짝을 지어 활을 쏘았는데,
맞힌 자는 상()을 주고, 맞히지 못한 자는 벌()을 주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후략)…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활쏘기를 무예만이 아닌, 심신 수양의 방법론으로 보았다.
활을 쏘는 예법을 사례(射禮)라고 하고, 종류에는 대사례(大射禮)와 향사례(鄕射禮)의 두 가지가 있는데, 주관하는 곳에 따라 임금이 주관하면 대사례,
대부나 지방관이 주관하면 향사례라고 하였다. 무려 왕과 함께 활쏘기를 하는 것은 물론, 과녁을 맞히지 못했을 때는 벌까지 받았다니
유생들에겐 과거시험보다 더 어려운 행사가 아니였을까?

 

이처럼 각 건물들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우리가 접하는 문화재를 컴퓨터로 예를 들자면 유물 또는 문화재들은 하드웨어이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역사)는 소프트웨어이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컴퓨터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듯 문화재 속에 담긴 역사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문화재 답사를 했다고 볼 수 없다
. 스스로 한번 자문해보자. 우리는 항상 겉으로 들어난 창경궁의 하드웨어만을 둘러보고 있지 않은가?
본 서적에 실린 소프트웨어(역사)를 잘 숙지하여 창경궁의 하드웨어와 접목시킨다면 그 순간부터 새로운 창경궁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목차

머릿말 _4

 

궁성과 문 _10

창경궁 개관 – 세 분의 대비를 위한 궁궐 _11

홍화문 – 백성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하는 문 _27

선인문 – 죽어서야 선인문을 나간 장희빈 _44

월근문 – 매월 슬픔에 잠기는 문 _56

집춘문 – 불시에 치르는 과거시험 통로 _74

 

치조 일원 _78

옥천교 – 후금사신에 대한 박대가 큰 재앙을 부르다 _79

명정문 – 특명: 조선왕실의 대를 이어라 _96

명정전 – 청계천 준설을 시작하다 _108

문정전 – 사도세자의 비극이 시작된 곳 _119

 

숭문당과 함인정 _134

숭문당 –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영조의 패착 _135

함인정 – 혜경궁 홍씨는 왜 대비가 아닐까? _143

 

내전 일원 _151

경춘전 – 인수대비가 서열 2위가 되기까지 _152

환경전 – 사도세자에게 한 약속을 뒤집는 영조 _163

통명전 – 계모가 먼저냐? 조강지처가 먼저냐? _174

양화당 – 삼전도의 굴욕을 기억하자 _187

영춘헌과 집복헌 – 정조는 과연 독살되었을까? _199

 

춘당지 일원 _207

춘당지 – 과녁을 못 맞추면 벌주를 마셔라 _208

저자 소개

志于學士 최동군(崔東君)

다음, 네이버, 페이스북 닉네임: 동쪽임금(東君을 풀어씀)

강원도 원주에서 육군 보병 장교 최준호 대위와 김주자 여사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남. 1973년부산 연제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동해중학교, 동인고등학교를 거쳐 1991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 문화재와 역사에는 특별한 지식이 없는 평범한 시민이었음. 그러던 중 1997년 태어나서 처음 참여한 2박 3일간의 ‘경주고적답사’에서 거의 신내림에 가까운 큰 문화적 충격 및 감명을 받았고, 그 후로 우리 문화재와 역사에 대해 독학으로 집중 공부함. 또한 평소 ‘배워서 남 준다’는 소신으로 많은 문화답사 강좌 및 모임을 통해 우리 전통문화와 역사를 전파하고 있음.

2013년부터 글로벌사이버대학교에서 ‘문화해설사 입문’ 과목을 강의중이며 2016년부터 성균관대학교에서 유교문화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유교문화 리모델링’ 과목을 강의함.

  • 주요 저서 및 논문
  • 창덕궁 실록으로 읽다(2017)
  • 경복궁 실록으로 읽다(2017)
  • 향교·서원 활용모델 개발에 관한 연구 (2016)
  • 8일간의 화성행차 정조반차도 (2016)
  • 현장학습 1번지 국립고궁박물관 (2016)
    (2017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 답사여행 1번지 경주 (2016)
  • 문화재 속 숨어 있는 역사 (2015)
  • 나도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다 Series
    궁궐편(2011), 사찰편(2012),
    북한산둘레길편(2013), 능묘편(상·하/2014)
  • 공식카페: cafe.daum.net/NaMoonSa
  • 카카오톡: EastKingKorea
  • 전자우편: EastKingKorea@gmail.com

이 슬라이드 쇼에는 JavaScript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