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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재 풍수답사기 시리즈4 – 산 나고 탑 나고 절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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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국 사람치고 풍수를 모르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풍수로써 복 받기를 바라지만, 풍수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다. 풍수가 한낱 무덤이나 보는 잡술로 변한 탓이다. 그러나 풍수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과 함께한 어엿한 학문이다. 다만, 제대로 된 체계를 갖추지 못해 왜곡되어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우리문화재에 스며있는 풍수를 조명하여 객관적인 토대를 마련하려했다. 이는 땅을 제대로 볼 줄 아는 풍수안목과 역사를 줄줄 꿰고 있는 필자의 십 수 년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각 권마다 400여장에 이르는 사진과 자료 등을 갖춘 우리문화재 풍수답사기는 일단 재미있다. 이는 우리 일상 속에 깊게 배어 있는 풍수문화를 발견하고, 우리역사까지 새롭게 인식해보는 재미이다. 더불어 우리문화재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안목을 갖춰다는 안도의 재미이기도 하다.

글, 사진 : 장영훈 Profile / 분류 : 답사기
판형 : 신국판 / 쪽수 : 300페이지 내외
가격 : 각 권 15,000원 / 발간일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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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훈. 본적은 독도다.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했다. 78년 혜정(慧淨) 큰 스님에게 득도. 산사 생활 중 입문한 풍수는 그 후 하산을 택하게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풍수현장과의 대조는 역사와 풍수, 그리고 문화재라는 현장풍수 전문가로 만들어 놓는다.
93년 부산일보 풍수 연재물을 시작으로 95년 국제신문까지 향토 문화풍수 내용들이 와일드 칼라 판으로 매주 1회씩 발표되었다.
96년 생활풍수 강좌를 대학강단 최초로 개설한다.
98년 한국 최초의 풍수교수 제1호(동아대학교 사교98-제1호)로 위촉되어 민속학 교수와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구성된 풍수과정 지도 교수를 맡았으며, 부산대학교에서는 고건축 석박사 과정을 대상으로 한 풍수 강의를 담당했다.
02년 대학강단을 떠나 지리산현장으로 다시 입산.
최근 현황은 풍수학문화를 위한 저술 집필과 05년 9월부터 시작되는 부산대학교 교양학부 「한국인의 삶터」 풍수강좌와 동 예술대학원 석박사과정 「한국인의 미의식」 특강 강좌를 개설시켜 놓은 상태다. 이에 대한 강의 준비를 하고 있으나 물
론 지리산을 떠나지 않는다. 풍수는 현장에서 살아 숨쉬는 전통 학문이기 때문이다.

< 주요활동 및 저서 >
국토연구원,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기도박물관 등 풍수 특강과 기장군지 편집위원으로서 향토문화풍수편 집필. 백담사 만해마을 영산대학교 캠퍼스 등 풍수 컨설팅.
저서로는 「부산의 풍수 – 한국평론」, 「영남의 풍수 – 동학사」, 「생활풍수강론 – 기문당」,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 – 대원사」, 「서울풍수 – 도서출판담디」 등 주요 저서와 함께 다수 풍수 논문이 있다.
※ 우리문화재 풍수답사기에 나온 내용 중 의문사항이 있을 경우 「http://www.mw.or.kr 장영훈의 풍수서원」에 들어오 셔서 우리문화재 풍수답사기 항목에 질의하시면 매주 한번씩 작가가 직접 답변하여 드립니다.


Series 4
사찰 – 산 나고 탑 나고 절 나고
288page / 295 Illustrations / 153×224㎜ / Soft Cover / Korean / ISBN 978-89-91111-26-4

흔히 ‘터무니없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는데, 여기서 ‘터무니’는 ‘터 무늬’에서 온 말로, 터를 잡은 자취, 어떤 일에 근거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 대찰들은 대부분 천년고찰들이다. 이미 삼국시대 터를 닦아 풍수로 사찰을 세웠는데, 관련 자료는 남아 있지 않더라도 그 터는 그 자리에 있기에 터만 제대로 읽어내면, 그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낼 수 있다. 화재 등으로 건물이 소실되어도 남아 있는 터를 근거로 원형 복원작업을 할 수 있다. 신라는 망하고, 건물은 소실되었지만 터는 남았다. 그 터를 근거로 조선시대 혹은 근래에 들어 건물을 복원해낼 수 있었다. 이 때 풍수는 아주 유용한 잣대로 쓰인다.
풍수가 한국학의 기초학문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불교에서 처음부터 사찰을 세운 것은 아니다. 처음 500년간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탑만을 세웠고, 그 후 사찰을 지어 부처상들을 모셨다. 책 제목인 <산 나고 탑 나고 절 나고>는 여기서 출발했다.
신라시대 왕들은 왕즉불(王卽佛)이라 하여 왕이 곧 부처라는 명목으로 절을 통치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이것이 화엄사찰인데, 불국사 같은 건물들이 궁궐을 닮은 이유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 불이문을 통과하여야 높은 곳에 위치한 커다란 대웅전을 머리 조아리며 볼 수 있다.
그 후 당나라에서 입국한 스님들을 중심으로 ‘내가 곧 부처’라는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이 유행하였고, 그런 절은 일주문과 대웅전이 가까우면서 나란히 놓여 있다. 지리산 실상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큰 규모의 사찰은 대부분 나라에서 관장하여 세웠다. 건축은 그 시대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권력의 함수관계와 맞물려 세워진 사찰을 잘 살피면, 당시의 정세까지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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